맨위로가기

파스쿠알 페레스 (권투 선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파스쿠알 페레스는 아르헨티나의 권투 선수로,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2년 프로로 전향하여 1954년 일본의 시라이 요시오를 꺾고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다. 9차례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으나 1960년 폰 킹펫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잃었고, 1964년 은퇴했다. 통산 전적은 84승 7패 1무이며,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권투 세계 챔피언 - 비토 안투오페모
    비토 안투오페모는 이탈리아 출신의 프로 권투 선수로, WBA/WBC 세계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영화 배우로도 활동했다.
  • 아르헨티나의 올림픽 참가 선수 - 빅토르 아벤다뇨
    아르헨티나 권투 선수 빅토르 아벤다뇨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1924년 파리 올림픽에도 참가하여 16강부터 준결승까지 승리했다.
  • 1948년 하계 올림픽 복싱 참가 선수 - 한수안
    대한민국의 권투 선수이자 지도자였던 한수안은 1948년 런던 올림픽 복싱 플라이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가 되었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와 대한복싱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건국포장과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 1948년 하계 올림픽 복싱 참가 선수 - 퍼프 라슬로
    헝가리의 수영 및 복싱 선수인 퍼프 라슬로는 올림픽에서 수영 2회, 복싱 3회 출전하여 복싱에서 금, 은, 동메달을 각 1개씩 획득하고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도 메달을 획득했으며,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그의 이름을 딴 스포츠 아레나가 부다페스트에 있다.
파스쿠알 페레스 (권투 선수)
기본 정보
파스쿠알 페레스 - 엘 그라피코 - 1948
파스쿠알 페레스 - 엘 그라피코 - 1948
본명파스쿠알 니콜라스 페레스
별칭엘 레온 멘도치노 (El León Mendocino, 멘도사의 사자)
테리어 (Terrier)
체급플라이급
신장150cm
스탠스오소독스
국적아르헨티나
출생일1926년 5월 4일
출생지아르헨티나, 멘도사주
사망일1977년 1월 22일 (향년 50세)
선수 경력
총 경기 수92
승리84
KO승57
패배7
무승부1
무효 경기해당 없음
메달 기록 (남자 복싱)
올림픽금메달: 1948 런던, 플라이급

2. 권투 경력

그는 1944년 1월에 아마추어로 데뷔했고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3]

그는 1944년 1월 아마추어 선수로 데뷔하여 125번의 시합에서 16개의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여기에는 1948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처음 우승한 토너먼트는 데뷔 2개월 만인 1944년 3월의 멘도치노 신인 선수권 대회였다.

같은 해에 그의 아버지는 포도원에서 페레스를 대신할 농부 인부를 고용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는 부모의 권리에 관한 규정에 따라 요구되는 법적 동의를 얻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의 계획에 대해 꺼리는 태도를 유지했고, 그는 부모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파블로 페레즈라는 이름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1946년과 1947년에 파스쿠알 페레즈는 멘도자, 아르헨티나 및 라틴 아메리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48년에는 아르헨티나 올림픽 복싱 팀이 선발되는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는데, 이 팀의 모든 선수가 올림픽 게임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 1948년 런던 올림픽 플라이급에서 금메달 획득.
  • 1952년, 기대 속에 프로 데뷔. 이후 18경기 연속 KO승을 기록.
  • 1954년 7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 시라이 요시오와 대전했으나 무승부로 끝나 연승은 23에서 멈춤. (시라이 요시오 대 파스쿠알 페레스전)
  • 1954년 11월 26일,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고라쿠엔 구장 특설 링에서 시라이가 가진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십에 도전. 판정 끝에 승리하여 챔피언 등극.[7]
  • 1955년 5월 30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라이와의 재대결에서 5R KO로 승리하여 첫 번째 방어 성공.
  • 1956년 1월 11일, 레오 에스피노사를 판정으로 꺾고 두 번째 방어 성공. 같은 해 6월 30일, 오스카 수아레스를 11R TKO로 물리치고 세 번째 방어 성공.
  • 1957년 3월 30일, 다이 도워를 1R KO로 격파하여 네 번째 방어 성공.[8] 같은 해 12월 7일, 영 마틴을 3R KO로 꺾고 다섯 번째 방어 성공.
  • 1958년 4월 19일, 라몬 아리아스를 판정으로 꺾고 여섯 번째 방어에 성공. 같은 해 12월 15일, 도미 우르수아를 판정으로 꺾고 일곱 번째 방어에 성공.[8]
  • 1959년 1월 16일, 논타이틀 경기에서 야오이타 사다오에게 판정패로 첫 패배를 기록. 같은 해 2월 18일, 요네쿠라 겐지와 논타이틀 경기를 벌여 판정승.

같은 해 8월 10일, 요네쿠라의 세계 타이틀 도전을 판정으로 꺾고, 여덟 번째 방어 성공.

같은 해 11월 5일, 오사카 풀 특설 링에서 야오이타 사다오와 세계 타이틀을 걸고 재대결하여 13R TKO로 승리, 아홉 번째 방어 성공.[8]

  • 1960년 4월 16일, 폰 킹핏치에게 판정패하여 결국 챔피언 타이틀을 잃고,[8] 그 해 9월 22일, 킹핏치와의 리턴 매치에서 8R TKO패.[8]
  • 1964년 3월 15일, 에우제니오 우르타도에게 6R TKO패를 당하고 은퇴.[8]
  • 1977년 1월 22일, 사망.
  •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 헌액되었다.


== 아마추어 경력 ==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파스쿠알 페레스(당시 22세)는 아르헨티나에 10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고(같은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2개의 금메달을 더 획득했다) 권투에서는 6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같은 날, 또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인 라파엘 이글레시아스가 금메달을 획득했다).[3] 페레스는 남미 밖에서 경기를 해본 적이 없었고, 유럽 챔피언인 스페인의 루이스 마르티네스 사파타와 같은 체급에서 경쟁할 예정이었고, 그와 대결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파타는 페레스와 마찬가지로 언론과 팬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금메달을 획득할 유력한 후보였다.[3] 처음에 파스쿠알 페레스는 그의 공식 체중이 더 무거운 체급의 복서인 아르놀도 파레스와 혼동되면서 대회에서 실격 처리되는 실수를 겪었다. 그러나 혼란이 정리된 후, 페레스는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고 실격 처분은 취소되었다.[3]

페레스는 먼저 필리핀의 리카르도 아돌포와 대결하여 2라운드 RSC(레퍼리 중단)로 승리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윌리엄스와 대결하여 역시 RSC로 승리했는데, 이번에는 3라운드였다. 8강전에서는 벨기에의 알렉스 볼라에르를 꺾었고, 준결승전에서는 체코의 프란티세크 마이들로흐를 꺾었다.[3]

결승전에서 페레스는 이탈리아의 스파르타쿠스 반델리니(28세)와 대결했는데, 반델리니는 8강전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마르티네스 사파타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1라운드에서 페레스는 공격적인 스타일로 경기를 지배하며 이탈리아 선수의 초반 공세를 제어했고, 강력한 오른손 펀치를 포함한 여러 차례의 펀치를 성공시켰다. 2라운드는 매우 치열했고, 반델리니는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싸웠고, 페레스는 그의 더 뛰어난 기동성을 활용하여 그의 왼손 펀치로 점수를 얻으며 이탈리아 선수가 방어를 내리는 경향을 이용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3라운드에서 페레스는 다시 시작부터 반델리니의 얼굴에 직접적인 왼손과 오른손 펀치를 연달아 날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흐름은 여러 번 바뀌었고, 결국 이탈리아 선수가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아르헨티나 선수는 어퍼컷으로 이탈리아 선수의 반격을 막았고, 라운드는 링 중앙에서 서로 펀치를 주고받으며 끝났다.[3]

잡지 ''피구라''의 펠릭스 프라스카라는 경기를 취재했고, 페레스의 승리 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파스쿠알 페레스는 라운드마다 자신의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먼저 그의 도시 멘도사의 챔피언이 되었고, (이후) 그의 지방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곧 그는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와 라틴 아메리카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의 둥근 체형은 주로 시간과 거리 감각이 뛰어나 완벽한 타이밍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격적이며, 몸무게에 비해 매우 강력한 펀치를 가지고 있으며, 라인을 잃지 않고 모든 자원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우리는 그가 아르헨티나 팀 최고의 선수이자 토너먼트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Pascual Pérez ha ido labrando su prestigio paulatinamente. Primero fue campeón de su ciudad, Mendoza. Luego de su provincia. Enseguida se consagró campeón argentino y más tarde campeón rioplatense y latinoamericano de peso mosca. Su figura, de líneas armónicas, se destaca por una multiplicidad de virtudes, entre las que sobresalen un perfecto sentido del tiempo y la distancia, una notable rapidez de reflejos, un boxeo agresivo, una pegada extraordinariamente fuerte para su peso y un aprovechamiento integral de todos los recursos, sin perder jamás la línea. Podemos decir que es el mejor boxeador del equipo argentino y uno de los más depurados estilistas del torneo.es[4]

페레스는 멘도사에서 영웅으로 불렸고, 지방 의회는 그에게 집과 직장을 제공했다. 특히, 1952년 올림픽 경기를 위해 아르헨티나 복서를 선발하기 위해 열린 다음 토너먼트에서 페레스는 프란시스코 칼바뇨에게 판정패를 당해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5] 선택된 아르헨티나 대표는 알베르토 바렌기였고, 그는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제거된 후, 페레스는 프로 복싱에 입문하기로 결정했고, 2년 후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 복싱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아마추어 경기는 1952년 11월 14일 골든 스트립 클럽에서 폴 라프레티를 상대로 5라운드 판정승을 거둔 경기였다.[6]

== 프로 경력 ==

페레스는 매니저 라자루스 코치와 함께 프로 경력을 시작했는데, 그는 호세 마리아 모노 가티카를 매니지했으며, 아르헨티나에서 프로 복싱을 재편했다.

1952년 12월 5일, 페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작은 도시 게를리에서 호세 치오리노를 4라운드 넉아웃으로 꺾고 프로 복싱 경력을 시작했다. 첫 6번의 경기를 넉아웃으로 승리한 후, 1953년 11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4라운드 넉아웃으로 승리하며 아르헨티나 플라이급 타이틀을 놓고 마르셀로 키로가와 대결했다.

페레스의 넉아웃 연승은 18연승으로 이어졌으며, 1954년 4월 22일 후안 비숍을 만나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둘 때까지 이어졌다.

=== 시라이 요시오와의 대결 ===

1954년 7월 24일, 23승 무패(22번 넉아웃 승)의 기록을 가진 페레스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요시오 시라이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논타이틀 경기로 만났다. 당시 대통령 후안 D. 페론의 지시를 받은 아르헨티나 주일 대사 카를로스 키로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라이를 상대로 타이틀을 걸지 않는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기는 1954년 7월 24일 루나 파크에서 페론 대통령이 링사이드에 참석한 가운데 10라운드로 치러졌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으며, 아르헨티나 프로 복서가 세계 챔피언에게 패배하지 않은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이 경기는 아르헨티나에서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 당시 복싱계의 관례에 따라 무승부로 인해 요시오 시라이는 아르헨티나 복서를 상대로 타이틀을 걸고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

1954년 11월 26일, 페레스는 도쿄 고라쿠엔 구장 특설 링에서 시라이 요시오가 가진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십에 도전하여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 챔피언 복서가 되었다.[7] 페레스는 2라운드와 12라운드에서 챔피언을 다운시켰고, 13라운드에서 15라운드까지 시라이를 여러 차례 거의 KO시켰다. 심판 잭 설리번은 146-139, 심판 빌 파체코는 143-139, 심판 쿠니하루 하야시는 146-143으로 모두 페레스에게 유리하게 판정했다. 파스쿠알리토는 타이틀을 획득한 가장 작은 플라이급 복서가 되었다.[8]

1955년 5월 30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라이와의 재대결에서 5R KO로 승리하여 첫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페레스는 브라질, 도미니카 공화국, 퀴라소, 일본, 파라과이, 필리핀, 태국, 우루과이베네수엘라에서 9번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다.[8]

1956년 1월 11일, 레오 에스피노사를 판정으로 꺾고 두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6월 30일, 오스카 수아레스를 11R TKO로 물리치고 세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1957년 3월 30일, 다이 도워를 1R KO로 격파하여 네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같은 해 12월 7일, 영 마틴을 3R KO로 꺾고 다섯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1958년 4월 19일, 라몬 아리아스를 판정으로 꺾고 여섯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12월 15일, 도미 우르수아를 판정으로 꺾고 일곱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1959년 8월 10일, 요네쿠라 겐지의 세계 타이틀 도전을 판정으로 꺾고, 여덟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11월 5일, 오사카 풀 특설 링에서 야오이타 사다오와 세계 타이틀을 걸고 재대결하여 13R TKO로 승리, 아홉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페레스는 1960년 4월 16일, 방콕에서 폰 킹펫에게 15라운드 판정으로 타이틀을 잃었다.[8] 같은 해 9월 2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킹펫과의 재대결에서는 8라운드 KO패를 당했다.[8]

=== 은퇴 ===

페레스는 그 후 28번의 시합에서 승리했는데, 대부분 이름 없는 선수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한때 유망했지만 쇠퇴하고 있던 우루과이의 왈데미로 토레스를 상대로 2번의 승리를 거두었다.[8] 그 후, 필리핀의 베테랑 레오 줄루에타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다음 두 번의 시합에서 파나마의 떠돌이 복서 마누엘 모레노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둔 후, 1963년 7월 23일 콜롬비아에서 영원한 세계 타이틀 경쟁자 베르나르도 카라발로와 맞붙었다. 페레스는 10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8]

그는 에콰도르, 멕시코파나마에서 시합을 치르며 선수 생활을 마쳤는데, 멕시코에서 열린 시합에서 미래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에프렌 토레스에게 3라운드 KO패를 당하는 등 1승 2패를 기록했다. 37세의 나이에 치른 그의 마지막 시합은 파나마의 에우제니오 우르타도와의 경기였으며, 1964년 3월 15일 기술적 KO로 패배했다.[8]

페레스는 84승 7패 1무의 전적을 기록했으며, 58번의 KO승을 거두어 50번 이상 KO승을 거둔 소수의 복서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8]

2. 1. 아마추어 경력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파스쿠알 페레스(당시 22세)는 아르헨티나에 10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고(같은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2개의 금메달을 더 획득했다) 권투에서는 6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같은 날, 또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인 라파엘 이글레시아스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페레스는 남미 밖에서 경기를 해본 적이 없었고, 유럽 챔피언인 스페인의 루이스 마르티네스 사파타와 같은 체급에서 경쟁할 예정이었고, 그와 대결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파타는 페레스와 마찬가지로 언론과 팬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금메달을 획득할 유력한 후보였다.[3] 처음에 파스쿠알 페레스는 그의 공식 체중이 더 무거운 체급의 복서인 아르놀도 파레스와 혼동되면서 대회에서 실격 처리되는 실수를 겪었다. 그러나 혼란이 정리된 후, 페레스는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고 실격 처분은 취소되었다.[3]

페레스는 먼저 필리핀의 리카르도 아돌포와 대결하여 2라운드 RSC(레퍼리 중단)로 승리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윌리엄스와 대결하여 역시 RSC로 승리했는데, 이번에는 3라운드였다. 8강전에서는 벨기에의 알렉스 볼라에르를 꺾었고, 준결승전에서는 체코의 프란티세크 마이들로흐를 꺾었다.[3]

결승전에서 페레스는 이탈리아의 스파르타쿠스 반델리니(28세)와 대결했는데, 반델리니는 8강전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마르티네스 사파타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1라운드에서 페레스는 공격적인 스타일로 경기를 지배하며 이탈리아 선수의 초반 공세를 제어했고, 강력한 오른손 펀치를 포함한 여러 차례의 펀치를 성공시켰다. 2라운드는 매우 치열했고, 반델리니는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싸웠고, 페레스는 그의 더 뛰어난 기동성을 활용하여 그의 왼손 펀치로 점수를 얻으며 이탈리아 선수가 방어를 내리는 경향을 이용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3라운드에서 페레스는 다시 시작부터 반델리니의 얼굴에 직접적인 왼손과 오른손 펀치를 연달아 날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흐름은 여러 번 바뀌었고, 결국 이탈리아 선수가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아르헨티나 선수는 어퍼컷으로 이탈리아 선수의 반격을 막았고, 라운드는 링 중앙에서 서로 펀치를 주고받으며 끝났다.[3]

잡지 ''피구라''의 펠릭스 프라스카라는 경기를 취재했고, 페레스의 승리 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파스쿠알 페레스는 라운드마다 자신의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먼저 그의 도시 멘도사의 챔피언이 되었고, (이후) 그의 지방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곧 그는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와 라틴 아메리카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의 둥근 체형은 주로 시간과 거리 감각이 뛰어나 완벽한 타이밍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격적이며, 몸무게에 비해 매우 강력한 펀치를 가지고 있으며, 라인을 잃지 않고 모든 자원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우리는 그가 아르헨티나 팀 최고의 선수이자 토너먼트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Pascual Pérez ha ido labrando su prestigio paulatinamente. Primero fue campeón de su ciudad, Mendoza. Luego de su provincia. Enseguida se consagró campeón argentino y más tarde campeón rioplatense y latinoamericano de peso mosca. Su figura, de líneas armónicas, se destaca por una multiplicidad de virtudes, entre las que sobresalen un perfecto sentido del tiempo y la distancia, una notable rapidez de reflejos, un boxeo agresivo, una pegada extraordinariamente fuerte para su peso y un aprovechamiento integral de todos los recursos, sin perder jamás la línea. Podemos decir que es el mejor boxeador del equipo argentino y uno de los más depurados estilistas del torneo.es[4]

페레스는 멘도사에서 영웅으로 불렸고, 지방 의회는 그에게 집과 직장을 제공했다. 특히, 1952년 올림픽 경기를 위해 아르헨티나 복서를 선발하기 위해 열린 다음 토너먼트에서 페레스는 프란시스코 칼바뇨에게 판정패를 당해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5] 선택된 아르헨티나 대표는 알베르토 바렌기였고, 그는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제거된 후, 페레스는 프로 복싱에 입문하기로 결정했고, 2년 후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 복싱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아마추어 경기는 1952년 11월 14일 골든 스트립 클럽에서 폴 라프레티를 상대로 5라운드 판정승을 거둔 경기였다.[6]

2. 1. 1. 1948년 런던 올림픽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파스쿠알 페레스(당시 22세)는 아르헨티나에 10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안겼고(같은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2개의 금메달을 더 획득했다) 권투에서는 6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같은 날, 또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인 라파엘 이글레시아스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페레스는 남미 밖에서 경기를 해본 적이 없었고, 유럽 챔피언인 스페인의 루이스 마르티네스 사파타와 같은 체급에서 경쟁할 예정이었고, 그와 대결할 가능성도 있었다. 사파타는 페레스와 마찬가지로 언론과 팬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금메달을 획득할 유력한 후보였다.[3] 처음에 파스쿠알 페레스는 그의 공식 체중이 더 무거운 체급의 복서인 아르놀도 파레스와 혼동되면서 대회에서 실격 처리되는 실수를 겪었다. 그러나 혼란이 정리된 후, 페레스는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고 실격 처분은 취소되었다.[3]

페레스는 먼저 필리핀의 리카르도 아돌포와 대결하여 2라운드 RSC(레퍼리 중단)로 승리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윌리엄스와 대결하여 역시 RSC로 승리했는데, 이번에는 3라운드였다. 8강전에서는 벨기에의 알렉스 볼라에르를 꺾었고, 준결승전에서는 체코의 프란티세크 마이들로흐를 꺾었다.[3]

결승전에서 페레스는 이탈리아의 스파르타쿠스 반델리니(28세)와 대결했는데, 반델리니는 8강전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마르티네스 사파타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1라운드에서 페레스는 공격적인 스타일로 경기를 지배하며 이탈리아 선수의 초반 공세를 제어했고, 강력한 오른손 펀치를 포함한 여러 차례의 펀치를 성공시켰다. 2라운드는 매우 치열했고, 반델리니는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싸웠고, 페레스는 그의 더 뛰어난 기동성을 활용하여 그의 왼손 펀치로 점수를 얻으며 이탈리아 선수가 방어를 내리는 경향을 이용하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3라운드에서 페레스는 다시 시작부터 반델리니의 얼굴에 직접적인 왼손과 오른손 펀치를 연달아 날리며 공격을 시작했다. 흐름은 여러 번 바뀌었고, 결국 이탈리아 선수가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아르헨티나 선수는 어퍼컷으로 이탈리아 선수의 반격을 막았고, 라운드는 링 중앙에서 서로 펀치를 주고받으며 끝났다.[3]

잡지 ''피구라''의 펠릭스 프라스카라는 경기를 취재했고, 페레스의 승리 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파스쿠알 페레스는 라운드마다 자신의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먼저 그의 도시 멘도사의 챔피언이 되었고, (이후) 그의 지방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곧 그는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와 라틴 아메리카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의 둥근 체형은 주로 시간과 거리 감각이 뛰어나 완벽한 타이밍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격적이며, 몸무게에 비해 매우 강력한 펀치를 가지고 있으며, 라인을 잃지 않고 모든 자원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우리는 그가 아르헨티나 팀 최고의 선수이자 토너먼트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Pascual Pérez ha ido labrando su prestigio paulatinamente. Primero fue campeón de su ciudad, Mendoza. Luego de su provincia. Enseguida se consagró campeón argentino y más tarde campeón rioplatense y latinoamericano de peso mosca. Su figura, de líneas armónicas, se destaca por una multiplicidad de virtudes, entre las que sobresalen un perfecto sentido del tiempo y la distancia, una notable rapidez de reflejos, un boxeo agresivo, una pegada extraordinariamente fuerte para su peso y un aprovechamiento integral de todos los recursos, sin perder jamás la línea. Podemos decir que es el mejor boxeador del equipo argentino y uno de los más depurados estilistas del torneo.es[4]

페레스는 멘도사에서 영웅으로 불렸고, 지방 의회는 그에게 집과 직장을 제공했다. 특히, 1952년 올림픽 경기를 위해 아르헨티나 복서를 선발하기 위해 열린 다음 토너먼트에서 페레스는 프란시스코 칼바뇨에게 판정패를 당해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5] 선택된 아르헨티나 대표는 알베르토 바렌기였고, 그는 첫 경기에서 탈락했다. 제거된 후, 페레스는 프로 복싱에 입문하기로 결정했고, 2년 후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 복싱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아마추어 경기는 1952년 11월 14일 골든 스트립 클럽에서 폴 라프레티를 상대로 5라운드 판정승을 거둔 경기였다.[6]

2. 2. 프로 경력

페레스는 매니저 라자루스 코치와 함께 프로 경력을 시작했는데, 그는 호세 마리아 모노 가티카를 매니지했으며, 아르헨티나에서 프로 복싱을 재편했다.

1952년 12월 5일, 페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작은 도시 게를리에서 호세 치오리노를 4라운드 넉아웃으로 꺾고 프로 복싱 경력을 시작했다. 첫 6번의 경기를 넉아웃으로 승리한 후, 1953년 11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4라운드 넉아웃으로 승리하며 아르헨티나 플라이급 타이틀을 놓고 마르셀로 키로가와 대결했다.

페레스의 넉아웃 연승은 18연승으로 이어졌으며, 1954년 4월 22일 후안 비숍을 만나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둘 때까지 이어졌다.

==== 시라이 요시오와의 대결 ====

1954년 7월 24일, 23승 무패(22번 넉아웃 승)의 기록을 가진 페레스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요시오 시라이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논타이틀 경기로 만났다. 당시 대통령 후안 D. 페론의 지시를 받은 아르헨티나 주일 대사 카를로스 키로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라이를 상대로 타이틀을 걸지 않는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기는 1954년 7월 24일 루나 파크에서 페론 대통령이 링사이드에 참석한 가운데 10라운드로 치러졌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으며, 아르헨티나 프로 복서가 세계 챔피언에게 패배하지 않은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이 경기는 아르헨티나에서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 당시 복싱계의 관례에 따라 무승부로 인해 요시오 시라이는 아르헨티나 복서를 상대로 타이틀을 걸고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

1954년 11월 26일, 페레스는 도쿄 고라쿠엔 구장 특설 링에서 시라이 요시오가 가진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십에 도전하여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 챔피언 복서가 되었다.[7] 페레스는 2라운드와 12라운드에서 챔피언을 다운시켰고, 13라운드에서 15라운드까지 시라이를 여러 차례 거의 KO시켰다. 심판 잭 설리번은 146-139, 심판 빌 파체코는 143-139, 심판 쿠니하루 하야시는 146-143으로 모두 페레스에게 유리하게 판정했다. 파스쿠알리토는 타이틀을 획득한 가장 작은 플라이급 복서가 되었다.[8]

1955년 5월 30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라이와의 재대결에서 5R KO로 승리하여 첫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페레스는 브라질, 도미니카 공화국, 퀴라소, 일본, 파라과이, 필리핀, 태국, 우루과이베네수엘라에서 9번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다.[8]

1956년 1월 11일, 레오 에스피노사를 판정으로 꺾고 두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6월 30일, 오스카 수아레스를 11R TKO로 물리치고 세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1957년 3월 30일, 다이 도워를 1R KO로 격파하여 네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같은 해 12월 7일, 영 마틴을 3R KO로 꺾고 다섯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1958년 4월 19일, 라몬 아리아스를 판정으로 꺾고 여섯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12월 15일, 도미 우르수아를 판정으로 꺾고 일곱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1959년 8월 10일, 요네쿠라 겐지의 세계 타이틀 도전을 판정으로 꺾고, 여덟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11월 5일, 오사카 풀 특설 링에서 야오이타 사다오와 세계 타이틀을 걸고 재대결하여 13R TKO로 승리, 아홉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페레스는 1960년 4월 16일, 방콕에서 폰 킹펫에게 15라운드 판정으로 타이틀을 잃었다.[8] 같은 해 9월 2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킹펫과의 재대결에서는 8라운드 KO패를 당했다.[8]

==== 은퇴 ====

페레스는 그 후 28번의 시합에서 승리했는데, 대부분 이름 없는 선수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한때 유망했지만 쇠퇴하고 있던 우루과이의 왈데미로 토레스를 상대로 2번의 승리를 거두었다.[8] 그 후, 필리핀의 베테랑 레오 줄루에타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다음 두 번의 시합에서 파나마의 떠돌이 복서 마누엘 모레노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둔 후, 1963년 7월 23일 콜롬비아에서 영원한 세계 타이틀 경쟁자 베르나르도 카라발로와 맞붙었다. 페레스는 10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8]

그는 에콰도르, 멕시코파나마에서 시합을 치르며 선수 생활을 마쳤는데, 멕시코에서 열린 시합에서 미래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에프렌 토레스에게 3라운드 KO패를 당하는 등 1승 2패를 기록했다. 37세의 나이에 치른 그의 마지막 시합은 파나마의 에우제니오 우르타도와의 경기였으며, 1964년 3월 15일 기술적 KO로 패배했다.[8]

페레스는 84승 7패 1무의 전적을 기록했으며, 58번의 KO승을 거두어 50번 이상 KO승을 거둔 소수의 복서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8]

2. 2. 1. 시라이 요시오와의 대결

페레스는 매니저 라자루스 코치와 함께 프로 경력을 시작했는데, 그는 호세 마리아 모노 가티카를 매니지했으며, 아르헨티나에서 프로 복싱을 재편했다.

1954년 7월 24일, 23승 무패(22번 넉아웃 승)의 기록을 가진 페레스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요시오 시라이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논타이틀 경기로 만났다. 당시 대통령 후안 D. 페론의 지시를 받은 아르헨티나 주일 대사 카를로스 키로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라이를 상대로 타이틀을 걸지 않는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기는 1954년 7월 24일 루나 파크에서 페론 대통령이 링사이드에 참석한 가운데 10라운드로 치러졌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으며, 아르헨티나 프로 복서가 세계 챔피언에게 패배하지 않은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이 경기는 아르헨티나에서 매우 특별한 사건이었다. 당시 복싱계의 관례에 따라 무승부로 인해 요시오 시라이는 아르헨티나 복서를 상대로 타이틀을 걸고 재경기를 치러야 했다.

2. 2. 2.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1954년 11월 26일, 페레스는 도쿄 고라쿠엔 구장 특설 링에서 시라이 요시오가 가진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십에 도전하여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아르헨티나 최초의 세계 챔피언 복서가 되었다.[7] 페레스는 2라운드와 12라운드에서 챔피언을 다운시켰고, 13라운드에서 15라운드까지 시라이를 여러 차례 거의 KO시켰다. 심판 잭 설리번은 146-139, 심판 빌 파체코는 143-139, 심판 쿠니하루 하야시는 146-143으로 모두 페레스에게 유리하게 판정했다. 파스쿠알리토는 타이틀을 획득한 가장 작은 플라이급 복서가 되었다.[8]

1955년 5월 30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라이와의 재대결에서 5R KO로 승리하여 첫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이후 페레스는 브라질, 도미니카 공화국, 퀴라소, 일본, 파라과이, 필리핀, 태국, 우루과이베네수엘라에서 9번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렀다.[8]

1956년 1월 11일, 레오 에스피노사를 판정으로 꺾고 두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6월 30일, 오스카 수아레스를 11R TKO로 물리치고 세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1957년 3월 30일, 다이 도워를 1R KO로 격파하여 네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같은 해 12월 7일, 영 마틴을 3R KO로 꺾고 다섯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1958년 4월 19일, 라몬 아리아스를 판정으로 꺾고 여섯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12월 15일, 도미 우르수아를 판정으로 꺾고 일곱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1959년 8월 10일, 요네쿠라 겐지의 세계 타이틀 도전을 판정으로 꺾고, 여덟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11월 5일, 오사카 풀 특설 링에서 야오이타 사다오와 세계 타이틀을 걸고 재대결하여 13R TKO로 승리, 아홉 번째 방어에 성공했다.[8]

페레스는 1960년 4월 16일, 방콕에서 폰 킹펫에게 15라운드 판정으로 타이틀을 잃었다.[8] 같은 해 9월 2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킹펫과의 재대결에서는 8라운드 KO패를 당했다.[8]

2. 2. 3. 은퇴

페레스는 그 후 28번의 시합에서 승리했는데, 대부분 이름 없는 선수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한때 유망했지만 쇠퇴하고 있던 우루과이의 왈데미로 토레스를 상대로 2번의 승리를 거두었다.[8] 그 후, 필리핀의 베테랑 레오 줄루에타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다음 두 번의 시합에서 파나마의 떠돌이 복서 마누엘 모레노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둔 후, 1963년 7월 23일 콜롬비아에서 영원한 세계 타이틀 경쟁자 베르나르도 카라발로와 맞붙었다. 페레스는 10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8]

그는 에콰도르, 멕시코파나마에서 시합을 치르며 선수 생활을 마쳤는데, 멕시코에서 열린 시합에서 미래의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에프렌 토레스에게 3라운드 KO패를 당하는 등 1승 2패를 기록했다. 37세의 나이에 치른 그의 마지막 시합은 파나마의 에우제니오 우르타도와의 경기였으며, 1964년 3월 15일 기술적 KO로 패배했다.[8]

페레스는 84승 7패 1무의 전적을 기록했으며, 58번의 KO승을 거두어 50번 이상 KO승을 거둔 소수의 복서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8] 1964년 3월 15일, 에우제니오 우르타도에게 6R TKO패를 당하고 은퇴했다.

3. 수상 및 유산

국제 권투 명예의 전당과 세계 권투 명예의 전당에 모두 헌액되었다. 사망 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 차카리타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5년 골드 올림피아 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카를로스 몬존, 니콜리노 로체, 빅토르 갈린데스와 함께 국제 권투 명예의 전당(IBHOF)에 헌액되었다. 2004년에는 아메리카 복싱 연맹으로부터 남아메리카 챔피언으로 공인받았다.

2007년 재개장한 멘도사 복싱 연맹의 멘도사 복싱 궁전은 그의 기념으로 에스타디오 파스쿠알 페레스로 명명되었다.[9]

1954년 작가 라파엘 라우리아와 음악가 헥토르 마우레, 세르지오 가스파리니는 탕고 "위대한 챔피언"을 작곡했으며, 헥토르 마우레가 녹음하였다.[10]

유명한 저널리스트 촌 로메로는 파스쿠알 페레스를 "벨이 울리는 순간까지 공격하는 것에 중독되었다."라고 칭찬했다.[11]

1980년, 코넥스 어워드 첫 번째 에디션에서 코넥스 재단은 페레스를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복서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여 공로상을 수여했다.

Boxrec.com은 페레스를 역대 최고의 플라이급 선수로 평가한다.

4. 프로 복싱 전적

결과전적상대형태라운드날짜장소비고
9284–7–1에우제니오 우르타도TKO6 (10)1964년 3월 15일
align=left|
9184–6–1에프렌 토레스KO3 (10)1963년 10월 19일
align=left|
9084–5–1아돌포 오세스PTS101963년 8월 9일
align=left|
8983–5–1베르나르도 카라발로UD101963년 7월 26일
align=left|
8883–4–1마누엘 모레노UD101963년 6월 16일
align=left|
8782–4–1레오 줄루에타SD101963년 4월 30일
align=left|
8682–3–1시릴로 아벨라네다KO7 (10)1963년 4월 12일
align=left|
8581–3–1후안 카를로스 모레이라PTS101963년 4월 5일
align=left|
8480–3–1로돌포 트리스PTS101963년 2월 16일
align=left|
8379–3–1미겔 에레라PTS101963년 2월 1일
align=left|
8278–3–1시릴로 아벨라네다PTS101963년 1월 25일
align=left|
8177–3–1후안 카를로스 모레이라TKO8 (10)1962년 12월 8일
align=left|
8076–3–1마르틴 루케KO5 (?)1962년 6월 15일
align=left|
7975–3–1로돌포 트리스PTS101962년 6월 9일
align=left|
7874–3–1시릴로 아벨라네다KO5 (10)1962년 5월 19일
align=left|
7773–3–1마르틴 루케TKO5 (?)1962년 5월 2일
align=left|
7672–3–1후안 카를로스 모레이라TKO3 (10)1962년 4월 27일
align=left|
7571–3–1우르시노 베르날TKO6 (10)1962년 4월 21일
align=left|
7470–3–1로돌포 트리스PTS101962년 3월 2일
align=left|
7369–3–1우르시노 베르날PTS101962년 2월 23일
align=left|
7268–3–1데메트리오 아코스타KO2 (10)1962년 1월 27일
align=left|
7167–3–1로돌포 트리스PTS101961년 12월 22일
align=left|
7066–3–1알베르토 가르시아TKO6 (?)1961년 10월 21일
align=left|
6965–3–1호세 디아스KO7 (?)1961년 10월 12일
align=left|
6864–3–1발데미로 토레스KO3 (?)1961년 9월 5일
align=left|
6763–3–1시몬 리오스KO6 (?)1961년 8월 19일
align=left|
6662–3–1발데미로 토레스KO8 (?)1961년 7월 29일
align=left|
6561–3–1후안 몬테베로KO5 (?)1961년 7월 15일
align=left|
6460–3–1휴고 비야레알KO3 (?)1961년 7월 8일
align=left|
6359–3–1프란시스코 바아몬데스TKO3 (?)1961년 5월 19일
align=left|
6258–3–1후안 몬테베로TKO6 (?)1961년 5월 13일
align=left|
6157–3–1파블로 소사KO3 (10)1961년 4월 9일
align=left|
6056–3–1후안 카를로스 모레이라PTS101961년 4월 1일
align=left|
5955–3–1휴고 비야레알TKO4 (?)1961년 3월 1일
align=left|
5854–3–1폰 킹펫TKO8 (15)1960년 9월 22일
5754–2–1폰 킹펫SD151960년 4월 16일
5654–1–1야오이타 사다오KO13 (15)1959년 11월 5일
5553–1–1요네쿠라 켄지UD151959년 8월 10일
5452–1–1요네쿠라 켄지PTS101959년 2월 18일
align=left|
5351–1–1야오이타 사다오UD101959년 1월 16일
align=left|
5251–0–1도미 우르수아UD151958년 12월 15일
5150–0–1티토 라고네UD101958년 11월 22일
align=left|
5049–0–1티토 라고네PTS101958년 8월 9일
align=left|
4948–0–1라몬 아리아스UD151958년 4월 19일
4847–0–1리카르도 발데스KO8 (?)1958년 3월 22일
4746–0–1영 마틴KO3 (15)1957년 12월 7일
4645–0–1콘라도 모레이라PTS101957년 9월 13일
align=left|
4544–0–1파블로 소사KO3 (10)1957년 8월 17일
4443–0–1우르비에타 소사TKO4 (?)1957년 8월 2일
4342–0–1루이스 히메네스UD101957년 7월 12일
align=left|
4241–0–1다이 다우어KO1 (15)1957년 3월 30일
4140–0–1콘라도 모레이라PTS101956년 12월 12일
align=left|
4039–0–1에르난 로하스RTD8 (10)1956년 9월 28일
align=left|
3938–0–1콘라도 모레이라PTS101956년 9월 6일
align=left|
3837–0–1엑토르 알마라즈KO3 (10)1956년 8월 25일
3736–0–1리카르도 발데스TKO5 (10)1956년 8월 4일
3635–0–1오스카 수아레스TKO11 (15)1956년 6월 30일
3534–0–1파블로 소사KO4 (10)1956년 6월 15일
align=left|
3433–0–1리카르도 발데스TKO6 (?)1956년 6월 8일
align=left|
3332–0–1마르셀로 키로가PTS101956년 3월 31일
3231–0–1안토니오 고메스TKO2 (10)1956년 3월 21일
align=left|
3130–0–1안토니오 고메스PTS101956년 2월 10일
align=left|
3029–0–1레오 에스피노사UD151956년 1월 11일
2928–0–1대니 키드PTS101955년 10월 22일
2827–0–1알베르토 팔로메케KO4 (10)1955년 8월 26일
align=left|
2726–0–1시라이 요시오KO5 (15)1955년 5월 30일
2625–0–1알베르토 바렌기KO3 (12)1955년 4월 13일
align=left|
2524–0–1시라이 요시오UD151954년 11월 26일
24무승부23–0–1시라이 요시오PTS101954년 7월 24일
align=left|
2323–0마르셀로 키로가KO4 (10)1954년 6월 25일
align=left|
2222–0파블로 소사RTD8 (10)1954년 6월 12일
align=left|
2121–0도밍고 산도발KO4 (10)1954년 6월 5일
align=left|
2020–0빈센테 브루노KO3 (?)1954년 5월 19일
align=left|
1919–0후안 비숍PTS101954년 4월 22일
align=left|
1818–0파블로 소사KO2 (10)1954년 3월 24일
align=left|
1717–0파블로 소사KO6 (10)1954년 3월 12일
align=left|
1616–0니콜라스 파에스KO1 (10)1954년 2월 24일
align=left|
1515–0올리덴 로하스KO3 (10)1954년 2월 13일
align=left|
1414–0마르셀로 키로가TKO4 (10)1954년 2월 6일
align=left|
1313–0안토니오 사파타RTD5 (10)1954년 1월 29일
align=left|
1212–0호세 도밍고 루나TKO2 (10)1954년 1월 19일
align=left|
1111–0네스토르 로하스RTD2 (10)1954년 1월 8일
1010–0로베르토 로메로KO2 (10)1953년 12월 30일
align=left|
99–0에르난 로하스KO2 (10)1953년 12월 23일
align=left|
88–0에두아르도 리우지RTD1 (10)1953년 11월 25일
align=left|
77–0마르셀로 키로가TKO4 (12)1953년 11월
align=left|



파스쿠알 페레스는 통산 84승(57KO) 7패 1무의 프로 복싱 전적을 기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A 30 años de la muerte de Pascual Pérez http://ar.sports.yah[...] 2014-09-16
[2] 웹사이트 Se cumplen 30 años de la muerte de Pascual Pérez. Pascualito, el León Mendocino http://www.pagina12.[...] 2014-09-16
[3] 웹사이트 Boxing at the 1948 London Summer Games: Men's Flyweight https://web.archive.[...] 2014-09-16
[4] 웹사이트 Pascual Pérez, un modelo peronista http://www.efdeporte[...] 1948
[5] 웹사이트 Alberto Barenghi https://web.archive.[...] 2014-09-16
[6] 웹사이트 Pascual Perez https://web.archive.[...] 2014-09-16
[7] 웹사이트 Pascual Pérez - Lineal Flyweight Champion http://www.cyberboxi[...] The Cyber Boxing Zone Encyclopedia
[8] 웹사이트 Boxeador: Pacual Pérez http://www.boxrec.co[...]
[9] 웹사이트 Esta noche se reabren las puertas del Pascual Pérez https://web.archive.[...] 2014-09-16
[10] 웹사이트 Al gran campeón de Héctor Mauré-Sergio Gasparini y Rafael Lauría https://web.archive.[...] 2014-09-16
[11] 웹사이트 ¡Pascual Pérez, pequeño y gigante sostenedor! http://www.titomendo[...] 2014-09-16
[12] 간행물 Se cumplen 30 años de la muerte de Pascual Pérez. Pascualito, el León Mendocino http://www.pagina12.[...] 2007-01-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